내 책장

단 한 사람

예쁜꽃이피었으면 2024. 2. 20. 10:52

P57
신금화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것은 그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P101
목화의 유년기에는 이미 금화의 실종이라는 충격이 있었다. 그것은 목화의 인생에 옹이를 남겼다. 중개를 시작하고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옹이는 거듭 늘었다. 자잘한 상처를 계속 받아서 서서히 약해지는 것 같았다. 짓무르고 썩어 줄기가 텅 비어가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는 얕은 바람에도 꺾이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금화를 데려간 나무처럼. 목수의 목숨을 뺏으려고 했던 그 나무처럼.

P103
기온과 습도에 따라 눈의 결정은 결정된다. 똑같은 결정은 없다. 각각 다른 눈송이는 결국 녹아 사라진다. 무미건조한 사실에 불과한데도 생각할수록 감정이 섞였다. 왜 모두 다를까. 다른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을까. 생명은 어째서 태어날까. 탄생이 없다면 두려워할 죽음도 없을 텐데.

P104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글쎄,살려달라는 말?/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사랑한다는 말./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P107
그리고 옆에서 곤히 잠든 노인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봤다. 반백 년 넘게 바라본 얼굴. 눈앞에 없더라도 입술 옆 작은 점까지 그려볼 수 있는 그 사람의 얼굴에 새벽빛이 드리웠다. 뭉친 이불을 정돈하고 어깨를 덮어주던 그는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리는 상대의 몸에 잠시 손을 갖다 대었다. 흔들어 깨우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끼는 듯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 그는 가볍게 상대의 몸을 토닥였다. 그는 그를 바라보고 누웠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편안한 잠 속에서 심장은 멈췄다. 마지막까지 바라보고 싶은 사람을 바라보다가 그는 죽었다.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을 목화는 목격했다.

P117
답이 없어도 비행기는 나는 거죠. … 이류를 몰라도 좋은 건 좋은 거고. … 왜 사는지 몰라도 계속 사는 것과 비슷하네요.

P133
나무는 속을 알 수 없었다. 겉은 상처 없이 단단해도 막상 잘라보면 속이 터지거나 썩어버린 나무가 있었고, 겉에 구멍이 있어 속도 어느 정도  곯았으리란 짐작과 달리 아주 매끈하고 단단한 속을 가진 나무도 있었다. 나이테나 옹이의 무늬 또한 나무마다 제각각이었다. 목재로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한 속을 가졌는지, 미술 작품처럼 아름다운 속을 가졌는지 일단 잘라봐야 알았다.

P203
거의 일상의 근심 걱정이지. … 근심이 어떤 이미지나 기운처럼 그 사람한테 붙어 있는데, 근심처럼 해답도 같이 붙어 있다는 게 포인트야. 각자 자기 근심에서 빠져나갈 길도 같이 품고 있는데 당장 너무 힘들고 아프니까 나갈 길은 못 보고 지옥만 보고 사는거지. 그렇다고 내 동생이 곧바로 나갈 길을 말해주느냐. 그건 또 아니라는 거지. 바로 말해주면 효과가 없대.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서 굳은 것을 풀고 막힌 것을 뚫어서 근심의 기운을 나갈 길보다 약하게 만들어줘야만 한대. 그래야 자기 힘으로 그 길을 걸어간다는 거야. … 자기가 자기를 구한다는 뜻이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거 아니잖아. 암흑이든 미로든 스스로 통과하는 수밖에 없어.

 

[느낀점]
최진영 작가는 '구의 증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구의 증명'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기에 '단 한 사람'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지레 짐작을 하고 책장을 넘겼다.

 

일화, 월화, 금화, 목화, 목수로 이어지는 이름이 초반에는 어지러웠다. 요일의 조합같기도 했는데 어떤 의미으로 이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궁금했다.(:여자, :남자, :쌍둥이, 일월:해와 달처럼  뗄 수 없는 존재? )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문득문득 그래서 금화는 어떻게 된 걸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가족들 모두 금화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실종이라고 생각하고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소설의 끝에 가서야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P56, P67, P95..)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역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눈의 결정처럼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답이 없는 근심에 삶을 지속하기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해답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버티기 힘든 일이라도 세번쯤 버티면 네번째는 아까워서라도 더 지속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삶이 이어지고 그 끝에 가서야 우리가 어떤 나무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목재로도 쓸 수 없게 지저분한지, 겉에 상처가 있어도 미술작품 같은 속을 가졌는지는 죽음 이후에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다른 삶과 죽음을, 사랑을 한다. 지금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말해주는 책이었던 것 같다.

덧붙이자면 한정원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하기엔 모자라지 않았을까..

 

1) 미수와 복일의 사랑(80) :
미수가 고사리무침을 먹으면 복일은 미수 앞으로 고사리 무침 접시를 옮겼다. 미수가 두부부침을 먹으면 복일은 미수 앞으로 두부부침 접시를 옮겼다. 미수의 젓가락이 구운 굴비로 향하자 복일은 굴비의 가시를 젓가락으로 발랐다. 미수가 물을 마시면 복일은 미수의 컵에 물을 따랐다.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 없이 밥 한 그릇을 다먹었다. … 복일은 미수를 안은 채로, 이 사람과 같이 살고 싶다고, 이사람이 눈을 떴을 때 언제나 내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
어느 노인의 죽음(107)
그리고 옆에서 곤히 잠든 노인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봤다. 반백 년 넘게 바라본 얼굴. 눈앞에 없더라도 입술 옆 작은 점까지 그려볼 수 있는 그 사람의 얼굴에 새벽빛이 드리웠다. 뭉친 이불을 정돈하고 어깨를 덮어주던 그는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리는 상대의 몸에 잠시 손을 갖다 대었다. 흔들어 깨우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끼는 듯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 그는 가볍게 상대의 몸을 토닥였다. 그는 그를 바라보고 누웠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편안한 잠 속에서 심장은 멈췄다. 마지막까지 바라보고 싶은 사람을 바라보다가 그는 죽었다.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을 목화는 목격했다
3)
임천자의 미수에 대한 사랑(227쪽)
장미수는 끝내 임천자와 화해할 수 없었다. 임천자는 장미수가 엄마를 계속 원망하고 미워하길 바랐다. 장미수에게는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자신은 기꺼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아주 오랜 후에야 장미수가 깨닫게 될 임천자의 사랑이었다.

반응형

'내 책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별하지 않는다.  (1) 2024.01.29
상실의 시대  (0) 2023.12.13
나는, 휴먼  (2) 2023.11.22
인플레이션에서 살아남기  (0) 2023.09.20
당신은 생각보다 강하다  (0) 2023.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