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장

작별하지 않는다.

예쁜꽃이피었으면 2024. 1. 29. 10:20

P44
특별한 미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총기 있는 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혼동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있었다. 피투성이 손에 헐렁한 환자복을 걸치고 팔뚝에 주렁주렁 주삿줄을 매달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약하거나 무너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P88
그녀의 침착한 성격을, 어떤 일도 쉽게 체념하지 않는 끈질긴 기질을 생각한다.
P251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 칼질을 하다 손가락에서 피가 날 때마다 생각났다고 엄마는 말했어. 손톱을 깊이 깎아서 상처가 날 때마다, 덜 아문 자리에 실수로 소금이 닿을 때마다 생각났다고 했어. 어둠 속에서 옴죽옴죽 엄마 손가락을 빨던 입이.
P314
머릿속 수천 개 퓨즈들에 일제히 불꽃 튀는 전류가 흘렀다가 하나씩 끊기는 것 같은 과정을 나는 지켜 봤어.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나를 동생이나 언니로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을 구하러 온 어른이라고도 믿지 않았고, 더 이상 도와달라고도 하지 않았어. 점점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가끔 말한다 해도 단어들이 섬처럼 흩어졌어. 응, 아니, 라는 대답까지 하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는 원하고 청하는 것도 없어졌어. 하지만 내가 까서 준 귤을 받아들면, 평생 새겨진 습관대로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나에게 건네며 가만히 웃었어. 그럴 때면 심장이 벌어지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나. 아이를 낳아 기르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생각했던 것도.

[느낀점]
언젠가 한강 작가가 문학상을 받았을 때 '흰'이라는 책을 사서 펼쳐보았다.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아서 몇 쪽 읽고 덮은 후 한강 작가의 책을 읽어볼 생각도 갖지 못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도서관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책제목이 눈에 들었고, 제목만 보고 읽기 시작했다. 꿈으로부터 시작한 글이 너무나 사실 같아서 이게 소설이 아니었나.하며 두어번 검색을 했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인선이라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인선의 성격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침착하고 긍정적이며 끈기가 있다.
이번 토론을 계기로 다시 읽어보니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의 고통과 그 고통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습이 더 세세하게 느껴졌다.
나였다면 원하지 않았던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 후 다시 가족을 보러 올 수 있었을까.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 오랜 시간을 행방을 알 수 없는 가족의 소식을 찾기 위해 헤맬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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