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장

각각의 계절

예쁜꽃이피었으면 2024. 7. 22. 11:32

<사슴벌레식 문답법>
P16
하지만 부영의 말대로 응석받이였던 나는 살아남았고 부영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정원은 어떤 응석도 없이 갔다. 그리고 정원이 떠난 지 이십 년 되는 날 밤 오래전의 내 못된 술버릇이 모조리 도졌다.
P29
우리는 어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떻든 시기가 언제든 우리는 이렇게 됐어. 삼 십 년 동안 갖은 수를 써서 이렇게 되었어. 뭐 어쩔 건데?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P39
내가 어쩌다든 이 지경이 되었다고, 아니 애초부터 이 지경이었다고, 삼십 년이 넘고 사십 년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비틀린 내시와 상궁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나는 진즉에 내가 그런 인간인 줄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질질 끌래, 부영이 묻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실버들 천만사>
P50
반희는 채운이 자신을 닮는 게 싫었다. 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닮음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게 몇천 몇만 가닥이든 끊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가 끊어진다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 여야 했다.
P75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늘 높이 아름답게>
P91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말을 떠들어대면서 도대체 어떤 기쁨을 느끼는 걸까. 가만히 듣는 것보다 열심히 말하는 게 그래도 뭔가 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그게 더 살아 있는 것 같아서?

 

<기억의 왈츠>

P209 고작 스물네 살일 뿐인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세상을 다 산 듯한 꼴로 살았다. 어느 순간 결심만 하면 삶을 준단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굳이 서둘러 그렇게 하지 않아도 조만간 세계에 어떤 파국이 와서 내 삶을 끝내주리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가깝게 느꼈고 미래를 생각하는 일에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뭇엇이 될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일은 마치 몸이 뒤집힌 채 거꾸로 치달려가는 느낌이었는데 그러다보면 결국 최악의 과녁에 정통으로 박히리라는 느낌, 그러면 끝장이라는 시원하고 원통한 예감만 들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내게 왜 그런 꼴로 사느냐고 물었다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았다면 나도 그렇게 속수무책이었을 리가 없다. 생생한 색채를 잃어버린 덧없는 그림자 같은 기운들로 가득했다.
당시의 나는 그런 모호라고 어두운 기운을 가만히 품고 있기만 했던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있는 그대로 때로는 더 과장해서 드러내곤 했다. 스물넷이었으니까, 위험한 무엇을 가만히 갖고 있는 것으로는 안 되고 그걸 어떻게든 뱉어내거나 발산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나이였으니까, 그 내용이나 표현이 기괴하고 언짢아서 누구에게도 제대로 가닿지 못하지란 걸 알 수도 없고 신경도 못 쓰는 나이였으니까.

P241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수박 앞에서가 아니라 일기 상자 앞에서, 두 겹을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숲속 식당에 가자는 편지를 읽고 내가 울 수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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